1994. 10. 『한국사상의 탐구: 人性物性論』, 한길사


任聖周의 人物性論


金    炫


1. 序論

2. 問題意識의 發端

3. 心論의 確立

4. 性論의 變化

5. 結論



 1. 序論


  鹿門 任聖周(1711-1788)는 조선후기 畿湖學派 性理學者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선배들이 공동의 관심사로 삼았던 人性ㆍ物性의 同異問題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자신의 철학을 형성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이점에서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녹문이 젊은 시절에는 人性과 物性이 같다고 하는 人物性同論에 찬성하다가, 자기 철학을 정립한 中年 이후에는 人物性 相異를 강조하는 人物性異論者가 되었다는 것이다.

  南塘 韓元震(1682-1751)과 巍巖 李柬(1677-1727) 사이에서 일어난 人物性同異論辨은 사실상 그것이 시작될 때부터 爭點에 대한 합리적인 성찰을 통해 합의된 결론에 도달하거나 어느 한편의 입장이 바뀌기를 기대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마치 그 이전 退溪와 高峯 사이의 四端七情論辨이 그러했듯이 이들은 각기 다른 문제를 주안점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心性을 善惡이 혼재된 인간 현실의 所以然으로 보느냐, 아니면 도덕적 理想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所當然으로 보느냐 하는 두 가지 입장이 그들 논변의 근저에 놓인 갈등적 요소의 실내용이었는데, 도덕지향적인 동시에 주지주의적이었던 程朱學의 성격상 이 두 가지 요소는 그 어느것도 쉽게 양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러한 식으로 입각점부터가 다른 사람들간의 논변에서는 자신의 입장을 아무리 설득력있게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상대방이 가진 문제의식에 대한 답안이 되질 못한다. 때문에 논쟁은 계속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상은 논변의 최초 당사자인 南塘과 巍巖에서뿐 아니라 이 논변에 가담한 湖ㆍ洛의 다른 학자들에게서도 거의 유사하게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같은 배경에서 陶庵 李縡(1680-1746)에게서 수학하고, 巍巖 李柬을 지지하였던 人物性同論者의 한 사람 鹿門 任聖周가 중년에 이르러 人物性 문제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고 하는 사실은 흥미롭게 보아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녹문은 어떠한 계기에서, 어떠한 사유의 과정을 거쳐 그의 새로운 인물성론을 정립하게 되었을까?



  2. 問題意識의 發端


  녹문은, 젊은 시절 남당과 외암의 논변을 접했을 때 남당의 주장보다는 외암의 주장이 마음에 더 와 닿았지만, 중년 이후에 외암의 이론 중 心論은 문제가 없지만 그의 性論은 합당치 않다고 여겨 人物性의 同異問題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수정하게 되었다고 하였다.1) 녹문이 초년부터 종신토록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는 心論은 인간이면 누구나 (聖人ㆍ凡人의 구별없이) 純善한 心體를 가지고 있다는 이론이었다. 반면, 그가 중도에 性論에 대한 입장을 바꾸었다고 하는 것은 초년에는 人物性의 相同을 주장하다가 중년 이후에는 人物性相異를 믿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입장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의 학문 활동 가운데 어떠한 문제의식이 개재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일 것이다. 그 계기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녹문이 그의 젊은 시절 어떠한 문제를 가지고 가장 고민하였는가 하는 데서 찾아질 수 있을 것이다. 유의할 점은 性論에서의 입장 변화를 야기한 그의 문제의식이 性論 그 자체가 아닌 心論에서부터 일어났다고 하는 점이다.

  사실상 녹문이 젊은 시절에 人性과 物性의 동이를 문제삼는 性論에 대해 가졌던 관심은 그렇게 치열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취했던 입장은 남당과 외암의 번쇄한 이론 자체를 불필요한 것으로 보고, 단지 本然之性으로 말하면 人性ㆍ物性이 모두 같다고 할 수 있으나, 氣質之性으로 말하면, 人性과 物性은 당연히 다른 것이 되니, 人性과 物性이 같으냐 다르냐 하는 것은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것이었다.2) 이러한 녹문의 생각은 인간과 사물에 보편적으로 품부된 理를 ‘本然之性’으로, 氣에 의해 특수하게 구현된 개물의 특성을 ‘氣質之性’으로 양분하여 보는 程朱學의 전통적인 性 개념을 그대로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未發心體의 善惡 문제를 다루는 心論의 영역에서 녹문은 그의 독자적인 철학이론을 정립하게 될 중요한 계기를 맞이하는데, 그것은 바로 陶庵 李縡와 屛溪 尹鳳九(1681-1767) 사이에 벌어진 心說 論辨을 접한 것이었다.  녹문의 나이 25세 때, 병계는 남당과 외암 사이에서 논의되던 문제의 일부를 도암에게 가져와 토론을 벌였다. 이때 병계가 제기한 이론은 氣가 淸濁不齊하니 그에 따라 聖人과 凡人의 심성에는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었는데, 陶庵은 이같은 그의 주장에 대해 氣가 차별적이라고 해서 心까지도 차별적으로 보아서는 안된다는 반론를 폈다. 하지만 병계가 이에 쉽게 동의하지 않자, 그의 설을 ‘明德分數說’이라고 지칭하고 明德의 不齊를 인정하는 그와 같은 논리를 따르면 孟子가 性善을 주장한 뜻이 어둠 속에 매몰되고 말 것이라고 격렬히 비난하였다.3) 

  당시 도암의 문하생이었던 녹문은 도암와 병계의 그같은 논변을 지켜보면서  인간의 心은 聖ㆍ凡의 구별없이 모두 선하다고 한 스승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의하였다. 하지만 녹문은 未發心體의 純善 및 聖凡心同을 주장하는 스승의 이론 속에는 논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사실도 아울러 직시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녹문이 26세 때( 1737 )에 도암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윤선생(屛溪 尹鳳九를 가리킴)께 답변하신 내용은 위 아래로 말뜻이 정밀하고 완비되어 의심할 것이 없읍니다만, 중간에 ‘氣만을 단독으로 가리키게 되면 云云’ 이라고 하신 한 단락은 끝내 이해되지 않습니다. ....  心의 虛靈은 오직 氣의 일로서  性과는 관련이 없는 것이니, 이 虛靈이 바로 이 마음의 본체입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편지에서는 먼저 ‘心은 본디 氣이되 반드시 性과 氣를 함께 언급해야 그 뜻이 갖추어진다’라고 하셨고, 이어서 ‘氣만을 단독으로 가리키게 되면 聖人과 衆人의 心이 다를 수 있다’라고 하셨읍니다. 이 말은 곧 ‘이 마음의 본체는 반드시 性과 虛靈을 합한 연후에 그 뜻을 다하게 되고, 虛靈만을 말하면 다를 수도 있다’는 뜻이 되니, 이렇게 되면 윤선생의 설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듯합니다.4)


  여기서 녹문은 心의 본체는 허령하고 순선하여 성범의 구별이 없다는 도암설의 대체에는 의심이 없으나, 이러한 전체적인 내용과 “氣만을 단독으로 가리키게 되면 성인과 중인의 心은 서로 같지 않을 수 있다”는 주장은 서로 모순을 이룬다는 지적을 하고 있다.  도암은 인간의 육신을 이루는 氣質은 비록 淸濁不齊할지라도 그 氣의 本體는 湛一할 뿐이며, 인간의 心은 바로 이 담일한 氣의 본체와 그 속에 깃든 理를 함께 지칭하는 것이라는 전제 하에 성범심의 동일을 주장하였는데, 다시 心 중에서도 氣만을 척출하여 單指하면 거기에는 不齊함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논리적 일관성을 결여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같은 의문에 대해 스승으로부터 명확한 해답을 듣지 못했던 때문인지, 녹문은 氣의 淸濁不齊와 心體의 純善性 간의 문제에 대해 오래도록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녹문은 일단 이 문제에 대해, 心과 氣質은 다같이 氣이기는 하나 양자 사이에는 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식의 답안을 마련하기는 했지만, 氣質과 心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는 명쾌한 설명을 해 낼 수가 없었다. 녹문은 이 시기에 그가 가졌던 고식적인 견해를 그의 훗날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젊은 시절 <<大學>>의 ‘明德’을 논할 때에, 心과 氣質의 구분에 대해서 스스로 명확히 설명해 냈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이 氣의 본체가 聖人ㆍ凡人의 구별없이 한결같다는 점에 대해서는 투철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단지 조악하고 탁박한 氣質에서부터 허령한 부분만을 발라내어 그것이 기질의 허물을 입지 않는 것으로 하였을 뿐이다.  그래서 말은 비록 매우 미묘하게 꾸며대었지만, 心이 氣의 神明이 되고, 氣가 心의 質幹이 되어 서로 의존하고 서로 견제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끝내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湖中 학자들이 주장하던 鏡鐵精粗의 논의5)를 힘써 배척하기는 하였지만, 내가 주장하던 바도 결국은 진흙과 물이 뒤섞인 듯한 불분명한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6)


  여기서 말하는 ‘젊은 시절’은 녹문이 도암-병계간의 심설논쟁을 지켜 보면서 양론의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였던 시기로부터 30 대 중반 새로운 理氣 개념의 정립에 도달하기 전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心論에 있어서의 녹문의 입장은 도암의 주장을 계승하여 聖凡心同의 說에 찬동하는 것이었으며, 그 이론의 실상은 氣質과 心에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 전자의 차별성의 후자의 순수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식의 주장은 ‘心是氣’의 전제 위에 心과 氣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해 온 기호성리학의 전통적인 심론에 부합하지 않는 면이 있다. 때문에 녹문은 자신과 도암의 心說에 대한 의심을 떨칠 수가 없었던 것이다.



  3. 心論의 確立


  녹문이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 未發心體의 純善을 명목에서뿐 아니라, 理氣論에 입각한 이론면에서도 무리없이 설명해 낼 수 있는 길을 모색하였다고 보여진다.  ‘心은 氣’라고 하는 것과 ‘인간의 心은 보편적으로 순선하다’고 하는 것, 이 두 가지 주장을 조화시키는 일이 그의 철학의 과제가 된 것이다. 녹문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張橫渠의 氣哲學에서 구하였다. 녹문은 자신이 심체의 순선성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계기에 대해, “중년 이후, 하늘의 신령에 힘입어 張子의 湛一에 대한 가르침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氣質이라고 하는 것이 비록 맑고, 탁하고, 순수하고, 잡박하게 수만 가지로 다르다고 해도, 그 本體는 단지 湛一할 뿐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하고, 그 결과 “心의 靈明은 바로 氣質의 靈明일 따름이요, 氣 밖에 별도의 靈明한 心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고, 아울러 性의 선함도 氣質의 善일 따름이니, 氣 밖에 별도의 선한 性이 있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다”7)고 하였다. 

  橫渠의 철학은 성리학에서 ‘理’라는 개념이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기 이전에 이루어진 것으로서, 모든 존재의 근원을 ‘氣’에서 찾는 것이다.  그가 비록 인성론에서 天地之性과 氣質之性을 구분하였다고는 하나, 도덕적인 天地之性의 근원도 유일한 본체인 ‘氣’로 환원되어지는 것이므로, 인간의 도덕성은 本體氣의 순수성에 의해서만 존재론적인 근거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氣의 淸濁不齊를 전제하는 한, 그 氣로 설명되는 활성적인 心의 순선을 입증하기는 어렵다고 여긴 녹문은 결국 ‘氣’를 보편적이고 순선한 본체로 보는 橫渠의 이론에 의거하여 氣의 보편적 湛一을 강조하는 새로운 존재론적 전제를 마련하였고, 이에 입각하여 심의 보편적 순선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이는 물론 도암의 聖凡心同說에 찬성하였던 초년의 입장을 일관되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 일관된 입장이란 어디까지나 心體가 聖凡의 구별없이 순선하다고 한 陶庵 및 巍巖 心說의 大體였을 뿐  心의 순선성을 입증하는 구체적인 논의에 있어서는 상당한 차이를 갖는 것이다.

  도암이 心의 순선성을 주장한 근거는 ‘心은 氣뿐 아니라 理를 함께 가리킨다’8)는 것과 ‘氣의 본체는 湛一하다’9)는 것이었다. 녹문은 도암이 제시한 이 두 가지의 心善의 근거 중에서 두번째 것만을 취하였다. 전자의 논의 속에는 명백히 理와 氣를 구분하는 뜻이 담겨 있는데, 理와 氣를 구분한다는 것은 암암리에 氣가 理에 비해 不純하다는 차별적 사고를 이끌게 되기 때문이다. 도암이 聖凡心同을 이야기하면서도 ‘氣만을 가리키게 되면 聖凡心이 같지 않을 수 있다’10)고 한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따라서 녹문은 오직 ‘氣의 本體가 湛一하다’는 사실에서만 心善의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여기게 되었으며, 그럴 수 있기 위해서는 氣 밖에 별도의 理가 인정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氣 밖에 별도의 理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理와 氣를 하나의 존재로 본다는 것이다. 心論에서의 이와 같은 요청은 녹문으로 하여금 理와 氣를 하나로 보는, 이른바 ‘理氣同實’이라고 하는 새로운 理氣關係를 정립하게 되었는데,11) 이와 같은 이론의 변화는 필연적으로 그의 性論도 다른 모습으로 바꾸어 놓게 되었다.



  4.  性論의 變化


  녹문은 자신이 性論을 바꾸게 된 이유를 한 마디로 ‘性論이 心論에 모순되기 때문’12)이라고 하였다. 왜 그런가? 앞에서 살펴 보았듯이 녹문이 초년기에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본 이유는 理의 보편성에 입각한 本然之性을 만물 공통의 性으로, 氣의 특수성에 입각한 氣質之性을 개별 사물 고유의 性으로 인식한 위에, 人ㆍ物의 본성은 어디까지나 本然之性을 기준으로 논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식의 人物性同論에는 사실상 ‘理로 보면 人性ㆍ物性이 같다’는 생각과 ‘氣로 보면 性은 人ㆍ物 사이뿐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도 다르다’는 생각이 함께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녹문이 주장한 바, 외암의 성론이 그의 심론에 모순된다는 것은 이 두가지 생각 가운데 후자를 지목한 것이다.  心論에서는 氣의 湛一을 근거로 心體純善과 聖凡心同을 이야기하다가  性論에 가서 ‘氣에 입각해서 보면 性은 인간들 사이에서도 다르다’13)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녹문은 理를 통해서 보든, 氣를 통해서 보든 인간의 心性은 보편적으로 純善하다는 결론을 이끌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本然之性(理를 통해 본 性)과 氣質之性(氣를 통해 본 性)을 구분하는 종래의 性 개념을 수정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녹문은 그러한 작업을 사물의 本性을 다룬 가장 대표적인 문헌인 <<孟子>> <生之謂性章>에 대한 분석을 통해 수행하였다.

  녹문이 <生之謂性章>의 연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어떻게 수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은 훗날(49세 때) 교우 伯高 金種厚에게 보낸 서간 가운데에서 그 자세한 내용을 살펴 볼 수 있다.  녹문은 백고에게 자신도 과거에는 本然之性을 만물의 보편성으로 보고 사물에 따라 다른 것은 氣質之性이라는 생각을 가졌는데, 孟子의 본지는 그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이와 같은 생각은 오랜 사유의 역정을 거쳐 어렵게 형성된 것인데, 그것은 문제 자체가 난해해서라기 보다, 기성의 견해를 무조건 묵수하는 인습적인 선입관의 장애 때문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녹문은 이어서, 자기가 새롭게 이해한 맹자 생지위성장의 문맥을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


먼저 고자가 ‘生之謂性’이라고 했을 때의 성이 本然之性을 가리키는 것인지 氣質之性을 가리키는 것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차츰 읽어 내려가며 어의의 향배와 문자의 맥락을 찾아 생각해 본다면, 白羽, 白雪, 白玉의 白과 犬之性, 牛之性, 人之性이 모두 生之謂性의 性을 가리키는 것이겠읍니까 아니면, 별개의 다른 것을 가리키는 것이겠읍니까?  이렇게 생각해 가면서 몇 차례 읽어 본다면, 이른바 犬ㆍ牛ㆍ人之性이 바로 生之謂性의 性이요, 生之謂性의 性이 바로 杞柳ㆍ湍水의 性이요, 杞柳ㆍ湍水의 性이 바로 性善의 性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性字를 썼을 뿐 두 말을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14)


  녹문의 이같은 설명의 요지는 告子가 말한 ‘生之謂性’에서부터 孟子가 뜻한 ‘순선한 사람의 性’(性善之性)에 이르기까지 그것들은 모두 개개 사물의 특수성을 가리키는 한 종류의 성을 의미하며, 이것이 바로 그 사물의 본연지성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녹문은 <生之謂性章>에 대한 이와 같은 자신의 이해가 <<孟子>> 본문의 문맥을 제대로 찾은 것이며, 기성학자들이 이렇듯 분명한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문리를 몰라서, 또는 선입관에 사로잡혀서 그러했던 것이라고 몰아부쳤다.

  전통적으로 生之謂性의 性은 사물의 氣質에서부터 말미암는 性(氣質之性)으로서 理로 설명되는 本然之性과는 다른 것이라고 여겨져 왔다.15) 그러나 <生之謂性章>의 분석을 통해 녹문이 얻은 결론은 사물의 氣質之性(生之謂性의 性)이 바로 本然之性이며 인간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곧 性善의 性이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性 개념의 변화는 人性ㆍ物性의 同異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뒤바꿔 놓는 결과를 수반하였다.

   녹문은 인간의 心이 性과 다름없는 순수성을 가지고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氣와 理의 차별을 부인했고 그러한 理氣 개념의 연장선상에서 本然之性과 氣質之性(生之謂性의 性)을 동일시했다. 그런데, 氣質之性이 바로 本然之性이라는 전제에서는 사물간에 氣質之性이 다를 경우 그 사물의 本然之性도 당연히 다르다고 보아야 할 것이 아닌가?  개별 사물의 氣質은 그것이 처음 태어날 때 氣化의 과정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니, 氣의 응취상태에 따라 다양성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녹문은 타고난 氣質이 상이한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는 本然之性의 차이를 인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었다.  녹문이 <生之謂性章>의 내용을 새롭게 이해한 이후 性에 대한 그의 논의는 氣質에 의해 구체화된 개물의 특성이 바로 그 사물의 本然之性이라는 주장으로 일관된다. 그는 <<孟子>>의  “天下가 性을 말하는 것은 그 드러난 자취<故>으로 말하는 것일 따름이다”, “形色이 天性이다”라는 귀절을 인용하면서 ‘性’의 뜻이 이보다 더 분명한 것은 없다고 하였다.16) 인간을 비롯한 모든 사물의 본성은 구체화된 氣質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주장은 자칫 선악이 혼재된 인간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대로 인간의 본성으로 인정하는 듯한 오해를 살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개별 사물의 氣質이 형성되는 氣化의 때에 인간은 本體氣의 순수함를 그대로 계승한 正通한 기질을 형성한는 이론을 세웠다.17) 녹문은 ‘氣質’ 밖에 따로 善한 性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는데18), 이는 인간의 기질은 보편적으로 正通하다는 전제에서 氣質之性과 本然之性을 일치시킨 논의였던 것이다.



  5. 結論


  巍巖ㆍ陶庵과 같은 人物性同論者들이 인성과 물성이 같다고 한 것은 그들이 心性에 대한 ‘氣의 제약성’보다는 ‘理의 보편성’을 중시했기 때문이었는데, 이렇듯 理의 보편성을 중시한 이유는 氣에 제약받지 않는 본연성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19) 하지만 이들도 기호학파 성리학자들로서 栗谷의 心是氣說과 理通氣局說을 따르고 있었다는 데에서 문제가 야기되게 되었다. 그들은 인간의 도덕능력이 가능적 원리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능력으로 확인되기를 원하였는데, 그것은 性의 보편성으로만으로 충분히 설명될 수가 없고, 氣로 이해되는 心의 윤리성이 함께 확인되어야만 했었다.  그래서 인물성동론자들은 性論에서 理의 보편성을 강조하다가 心論에 와서는 氣의 보편성을 강조하였는데, 이들에게는 또 기본적으로 氣의 차별성에 주목하는 사고가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문제에 대한 명쾌한 해명이 불가능하였다. 이점에 대해 고민하던 녹문은 心의 윤리성을 확보하기 위해 理通氣局의 전제를 무너뜨리고 氣 자체에 보편적인 도덕성을 부여하였다.  그 결과, 인간의 도덕성을 설명함에 있어 이제는 더이상 氣의 제약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心과 性은 윤리적으로 동일한 위상에 설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그의 논리는 거꾸로 발전한다. 心과 性이 동일한 것이라면, 心에 의해 구체화된 모습이 바로 性의 내용일 것이다. 인간과 사물에 있어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 다르다면 그것의 性도 또한 서로 다르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남당을 비롯한 호서 학자들의 人物性異論은 氣의 차별성을 중시한 데서 나온 이론이지만, 녹문의 人物性異論은 氣의 보편성을 통해 心의 윤리성을 확보한 연후, 거기서 발용되는 구체성을 本性의 차원으로 올려놓은 데서 도출된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녹문의 人物性論이 갖는 특징을 필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한다. 그 첫번째는 녹문의 인물성론은 理氣心性의 관계를 이론적으로 설명해 내고자 하는 입장에서가 아니라, 心體의 순성성을 확증고자 하는 윤리적 목적의식에서 추구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이 점은 녹문의 인물성론이 인간의 도덕성을 心의 실천적인 능력에서 찾고자 했던 외암ㆍ도암 등 인물성동론자들의 심성론을 적극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두번째는 녹문의 인물성론이 洛學의 同論에서 출발하였으면서도 결과적으로 湖學에서 주장하던 人物性相異說에 동의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동론자들은 남당ㆍ병계의 이론을 맹자의 뜻에 어긋나는 주장이라고 비난하였지만, 동론자들의 주장만이 孟子 性善說의 원의에 부합하는 것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 맹자는 사실상 心善을 통해 性善을 밝혔고, 이점은 洛學의 心論이 그 뜻을 십분 계승한 바이지만, 또 한편 맹자는 인간의 도덕성을 다른 사물의 특성과 구별하여 그것이 인간 고유의 존엄성임을 천명하였다. 이점에 있어 人物性同論은 異論에 비해 취약한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人物性異論은 理氣二元論의 전제 위에서 理氣心性의 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였다는 主知主義的 특성 이외에도  인성의 독특한 고귀성을 강조함으로써 인간성의 권위를 확립하려 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20)  녹문이 洛學 心論의 연장선상에서 湖學의 性論을 수용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거기에  洛論과는 또다른 측면에서의 윤리적 장점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答金幼道>, <<鹿門集>>3, 36b


2)  “天地生物, 其理固無差別者, 指本然之性也.  人物所稟, 形氣不同, 故其心有明暗之殊, 而性有全不全之異者, 指氣質之性也” ( <中庸>, <<鹿門集>>13 雜著, 22a - 22b )


3)  <答尹瑞膺>, <<陶庵集>>10, 12a - 18b


4) “所答尹丈書, 上下語義精切完備, 無復可疑, 而中間單指氣云云一段, 終覺未安 ..... 盖心之虛靈, 只是氣之爲耳, 初不干性事, 而卽此虛靈, 便是此心之本體也. 今於上文曰: ‘心固氣也, 而必合性與氣言之, 其義乃備.’ 而繼而曰: ‘單指氣而言, 則聖人衆人之心, 容有不齊.’ 其意若以此心本體, 必合性與虛靈, 然後方盡其義, 而單說虛靈, 則便有不齊也. 如此則與尹丈說, 殆無甚異.( <上陶庵先生>, <<鹿門集>>1, 4b - 5b )


5)  心과 明德의 관계를 거울과 빛의 관계에 비유하여 心 자체를 차별적으로 본다고 해도 그것이 明德의 虛靈을 해치지는 않는다고 한 南塘의 설. ( <答尹瑞膺>, <<南塘集>>13, 21a 참조. )


6) “少時論大學明德, 於心與氣質之辨, 自謂說得明覈. 而但於此氣本體, 聖凡一致處, 未及透徹, 而只欲就惡濁氣質上, 剔發出虛靈體段, 使不帶累. 是以其言雖極微妙, 終無奈心爲氣之神明, 氣爲心之質幹, 相爲因依, 相爲牽連, 而終掉脫不得. 故雖力斥湖中鏡鐵精粗之論, 而吾之所以爲說者, 亦終不免於拖泥而帶水也.( <大學>, <<鹿門集>>16 雜著, 2a-2b )


7) “幸於中歲以後, 賴天之靈, 有味乎張子湛一之訓, 而知所謂氣質者, 雖淸濁粹駁, 有萬不齊, 而其本體, 則只湛一而已矣. 然後乃見夫心之靈者, 卽氣之靈耳, 非氣外別有靈底心也; 性之善者, 卽氣之善耳, 非氣外別有善底性也.( <大學>, <<鹿門集>>16 雜著, 2b )


8)  “心固氣也, 然必合性與氣言之, 其義乃備.” ( <答尹瑞膺>, <<陶庵集>>10, 13a )


9)  “氣之爲物, 雖有淸濁粹駁之不同, 其本則湛一而已矣.” ( 同上 )


10) “單指氣言之, 則理一也ㆍ 氣二也, 聖人ㆍ衆人之心, 容有不齊者.” ( 同上 )


11) “天體至大而至純, 故其德亦至大而至純. 體卽是氣, 德卽是理, 器亦道, 道亦器也.( <答朴永叔>, <<鹿門集>>6, 42b - 43a )

    “論理氣, 則必以理氣同實ㆍ心性一致爲宗指.”  ( <答李伯訥>, <<鹿門集>>5, 6a )


12) <答金幼道>, <<鹿門集>>3, 36b


13) “五常之有粹駁, 氣稟然也.( <上遂庵先生>, <<巍巖遺稿>>4, 33b )


14) “先思告子所謂生之謂性之性, 是指本然之性, 指氣質之性. 然後次次讀下, 尋其語意向背ㆍ文字脈絡, 以思夫所謂白羽ㆍ白雪ㆍ白玉之白, 與犬之性ㆍ牛之性ㆍ人之性, 是皆指生之謂性之性耶, 抑別指他耶? 如是想來想去, 諷誦數四, 則便見得所謂犬ㆍ牛ㆍ人之性, 卽是生之謂性之性, 生之謂性之性, 卽是杞柳ㆍ湍水之性, 杞柳ㆍ湍水之性, 卽是性善之性, 從頭至尾, 元只是一箇性字, 更無二語.( <答金伯高>, <<鹿門集>>6, 2b - 3a )


15) “生, 指人物之所以知覺運動者而言 ..... 生者, 人之所得於天之氣也 ..... 告子不知性之爲理, 而以所謂氣者當之.( 朱熹, <<孟子集注>>, 告子上 3)


16) “孟子曰: ‘天下之言性則故而已’, 又曰: ‘形色天性也.’ 此兩言者, 人多忽之, 然義莫明於此也.” ( <鹿廬雜識>, <<鹿門集>>19 雜著, 24b - 25a )


17) “若人則稟得正且通者以生, 故其方寸空通, 卽此空通, 而是氣全體, 豁然呈露, 無所蔽遮, 而與天地本氣貫通爲一.( <與李伯訥>, <<鹿門集>>5,  8a )


18) “人性之善, 乃其氣質之善耳, 非氣質外, 別有善底性也.” ( <鹿廬雜識>, <<鹿門集>>19 雜著, 5a )


19) 尹絲淳, <人性物性의 同異論辨에 대한 硏究>, <<哲學>> 18, 韓國哲學會, 1982


20) 同上